오늘의 단상(斷想)

[5.22 2009] 배호님 묘소의 두 노래 비(碑) 작사가, '인성'님과 '반야월'님

BaiZZang 2009. 5. 22. 18:18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일영리 33-1 소재 신세계공원의 배호님 묘소를 방문해 보면 

배호님 묘소 오른편에는 생신일과 사망일이 적히지 않은 배호님의 이름만 적은 단출한 묘비가 있다.

 

앞면"배호님의 고 배신웅의 묘 (가수 배호)", 뒷면 "어머님 김금순, 여동생 배명신"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배호님 돌아가실 적에 어머니와 여동생의 눈물로 세운 비석이다.

 

묘소 가운데 앞쪽으로는 조그마한 노래비(碑)가 제단 대신 서 있다.

 

이것은 1967년 11월 7일 배호님이 돌아가신 후 5일장 장례식과 묘지에 묻힌 날짜(1967.11.11)로 작곡가 배상태님이 남긴 비석이다.

이 비석은 조그마하게 앞면에 <돌아가는 삼각지> 노래 가사와 뒷면에는

"70.12.1 제4회 서라벌 가요대상 최우수 가수상 수상 (외29개 부분상 수상)" 이란 문구가 있다.   

 

앞면 <돌아가는 삼각지> 부분을 잘 살펴보면 "인성 작사, 배상태 작곡, 배호 노래"라고 되어 있다.

 

서울 삼각지의 <돌아가는 삼각지> 노래비에는 작사가 이름이 '이인선, 배상태 작사'로 되어 있는데 왜 배호님 묘소앞 배상태님이 기증한

기념비에는 '인성 작사'로 되어 있을 까? 혹시 '이인선' 작사가 '인성'으로 세월이 흘려 글자가 조금 변한 것은 아닐까?  

 

매우 궁금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인성'은 배상태님의 예명으로 동일한 인물이다.

이것은 동일한 작사자와 작곡가가 같은 곡에서는 다른 이름으로 예명을 쓰는 유행에 따른 것이다.

 

'인성' 이란 배상태님이 본인이 작곡과 작사를 동시에 완성한 곡에 가끔씩 붙이는 예명이다.

 

그럼 삼각지 로터리의 <돌아가는 삼각지>에는 배호님 묘지의 '인성 작곡' 표기 대신에 '이인선, 배상태 작사'으로 된 이유는 뭘 까?

 

원래 이곡은 배상태님이 1961년경 군대 휴가차 용산 부근 통술집에서 혼자 술을 먹으며 악상이 떠 올라 바로 작사, 작곡을 하였던 곡이다.

작사가 이인선님은 노래말을 같이 지었다기 보다는 배상태님이 지어 놓은 가사 몇 군데를 고쳐준 연유로 공동 작사가로 등록이 되었다.

 

그래서 1967년 배호님 묘소의 조그마한 노래비 <돌아가는 삼각지>에는 작사가는 '인성' (배상태님 예명) 단독 이름으로,  

2002년 서울 용산 삼각지의 <돌아가는 삼각지>에는 작사자가 '이인선, 배상태' 으로 공동 작사가로 이름이 오르게 된 것이다.

 

현재에도 가수, 작곡자, 작사가 등 많은 예능인들은 본명대신 예명을 많이 쓰는데 그 이유는 뭘까?

 

예명을 사용하여 자신의 개성, 예술적 성향 같은 것을 표현할 수 있겠다는 이유 이외에도 작사자과 작곡가가 독립되어 있는 현재와는 달리

그 당시 작사자와 작곡자가 겸하거나 레코드 회사에 전속되는 수가 더 많아서 레코드사에 따라 다른 예명으로 달리 표현하기도 하였다.

 

그러다 보니 동일한 사람이 여러 레코드사에 노래를 주는 경우 혼란 스러워졌고 더군다나 일제시대에는 만들어진 노래에 등장한 필명은

아직도 다 밝혀 지지 않은 경우도 있다.

 

배호님의 묘소에는 <두메산골>이란 커다란 노래비가  옆에서 지켜 보고 있다.

2002년 4월 21일 '배호를 기념하는 전국모임' (2001.12.21 창립)이란 팬 클럽에서 순수하게 팬들의 비용으로 건립한 것이다.

 

"不世出의 가수 裵湖 노래비"라는 글귀의 돌 위에 광택의 검은 대리석위에 배호님의 초기 데뷔곡인 <두메산골> 노래

(반야월 작곡, 김광빈 작곡, 배호 노래)와 노래가사 1절과 2절이 적혀 있다.

옆면에는 배호님 약력, 건립경위, 뒷면에는 <배호를 기념하는 전국모임> 회장단, 유족, 자문위원단, 16개 시도지부장단 명단이 있다.

 

이 노래비에 나오는 작사자 반야월님도 예명이다. 

 

* <두메산골>의 작사가 반야월님 (半夜月): 1917.8.1. - 현재 생존, 경남 마산 출생

 

'70여년의 한국 대중음악의 산 증인' 

본명: 박창오(朴昌吾), 가수로는 진방남(秦旁南)이란 예명을 데뷔부터 사용

그밖에 예명: 추미림(秋美林), 박남포(朴南浦), 허구(許久), 남궁려(南宮麗), 금동선(琴桐線),

고향초(高香草), 옥단춘(·玉丹春), 백구몽(白鷗夢) 등 

최다 노래 작곡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노래 (5천여곡, 저작권협회 9백여곡 등록), 가장 많은 히트곡 작사

최다 노래비 ('내 고향 마산항' '단장의 미아리고개' '울고 넘는 박달재' '만리포 사랑' '두메산골' '소양강 처녀'

'삼천포아가씨''산장의 여인''무너진 사랑 탑' 노래비 등 10 여개의 노래비), 

이 중 하나인 <두메산골>의 노래비가 배호님 묘소에 있다. 

 

대표 곡: '울고 넘는 박달재''눈물 젖은 두만강', ‘소양강 처녀’'애수의 소야곡'  ‘단장의 미아리고개’ 등

 

가수로 데뷔: 1937년 전국가요음악콩쿨 신인가수 선발 1등 입상 (경북 김천에서 조선일보사와 태평레코드사 주최)

      1938년 "불효자는 웁니다" 취입 하면서 가수생활 시작

작사가 데뷔: 1939년 "넋두리 이십년" "꽃마차"를 작사하면서 작사가 생활 시작

* 가수시절부터 노래보다 작사 분야에서 더 많은 활약 , 최초 악극단 창단과 방송국 악극을 쓰기도 함.

 

이렇듯 배호님의 묘비에는 배호를 기념하는 전국모임의 <두메산골> 노래비와 배상태님이 기증한 <돌아가는 삼각지> 노래비가

배호님의 초기 데뷔시절과 배호님 최고의 시절을 대변하여 오늘도 묘소를 찾는 사람들에게 배호님의 추억에 잠기게 하고 있다.

 

♬ 오늘 듣고 싶은 배호의 노래 = 두메산골